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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지는 복음시대, 복음이 전달되는 방식에 대한 우려들에 대해

포스팅날짜
2025/10/25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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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미션
보여지는복음
아티클
상태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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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마케팅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도와 선교 전략에 많은 분들이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우려를 회피 하지 않고 직면하며 답하는 형식으로 기고해 보았습니다. 미디어 사역에 대한 기술적인 접근보다 근본적인 사역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작성하였습니다.

무엇을 경계하고 붙들어야 하는가?

본질과 방향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바다로 항해를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 우리 마음속에는 기대와 함께 두려움의 파도가 밀려옵니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의 물결 속에서 자칫 방향을 잃고 복음의 닻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염려, 애써 만든 콘텐츠가 아무런 울림 없이 사라져 버릴 허무함에 대한 걱정은 모든 사역자가 마주하는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중요한 길목에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두려움의 정체를 똑바로 마주하고,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 우리는 더 단단하고 지혜로운 항해사가 될 수 있습니다.
미디어 선교의 여정에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6가지 대표적인 우려를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위험을 경고하는 경고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우려 사항을 복음의 본질을 더욱 굳게 붙들 기회로 전환시키는 지혜의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경계하고, 그럴수록 더욱 힘주어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1. 쇼화(Show-化)와 가벼움: 복음이 값싼 쇼가 되는가?

미디어는 본질적으로 ‘보여주는’ 매체입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썸네일, 속도감 있는 편집, 감각적인 자막과 배경음악. 복음의 깊고 진중한 메시지가 이 화려한 옷을 입을 때, 그 무게와 본질을 잃고 한낱 가벼운 ‘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이 우려는 미디어의 속성을 정확히 꿰뚫어 본 지극히 타당한 염려입니다. ‘좋아요’와 ‘조회 수’로 평가받는 디지털 생태계는 우리를 끊임없이 더 자극적이고, 더 재미있고, 더 피상적인 콘텐츠를 만들도록 유혹합니다. 진리 그 자체보다 진리를 담는 ‘그릇’의 화려함에 집착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전달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박수를 갈구하는 ‘디지털 바리새인’이 될 위험에 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쇼화’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해답은 ‘사명 우선(Mission First)’의 원칙을 회복하고, ‘거룩한 탁월성(Holy Excellence)’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본질을 위한 수단, 다리가 되는 쇼: 우리는 ‘쇼’를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가는 ‘다리’를 놓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비유)’라는 형식을 사용해 하늘의 비밀을 가르치셨듯, 우리도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미디어의 문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마음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박수갈채가 아니라, 다리 저편에 있는 복음의 진리로 한 사람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쇼는 목적이 아니라, 사명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도구입니다.
깊이를 담는 탁월성: 가벼움의 반대는 어설픔이나 지루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콘텐츠보다 더 뛰어난 ‘탁월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다만 그 목적이 다릅니다. 세상의 탁월함이 사람의 영광을 위한다면, 우리의 탁월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의 가치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함입니다. 잘 디자인된 자막은 메시지의 가독성을 높여주고, 안정적인 음향은 말씀의 집중도를 더해줍니다. 탁월한 형식은 메시지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깊이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최고의 그릇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우리의 심장이 ‘좋아요’ 숫자에 뛰는가, 아니면 한 영혼의 변화에 뛰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미디어라는 화려한 도구를 가지고 가장 진중하고 깊이 있는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지혜로운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2. 기술 의존과 본질 상실: 성령님을 잊은 사역?

최신 카메라 장비, AI 기반의 자동 편집 프로그램, 정교한 타겟 광고 시스템… 이 놀라운 기술의 힘에 감탄하고 의지하다 보면, 어느새 기도보다 장비 사양을 더 따지고,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데이터 분석을 더 신뢰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기술의 편리함이 우리를 영적 나태함으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기술은 우리에게 ‘통제할 수 있다’는 강력한 착각을 심어줍니다. 버튼을 누르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고 비효율적인 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기술에 중독된 사역자는 결국 마른 뼈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생기가 아닌, 자신의 능력과 기술을 외치는 예언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위험 앞에서 우리는 기술을 ‘우상’이 아닌 ‘제단’으로 재정의해야 합니다.
기술은 증폭기, 성령은 동력: 마이크는 목소리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다만 존재하는 목소리를 더 멀리, 더 분명하게 전달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미디어 기술은 복음의 능력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있는 복음의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효과적으로 증폭시킬 뿐입니다. 우리의 사역은 어떤 카메라를 쓰느냐가 아니라, 그 카메라 앞에 선 우리가 얼마나 성령으로 충만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가 가장 강력한 콘텐츠 전략: 모든 콘텐츠 기획 회의는 전략 분석이 아닌 기도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지금 이 시대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필요합니까? 그들의 아픔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들의 질문에 답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기도가 선행될 때, 데이터는 비로소 영혼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고, 기술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수단이 됩니다. 가장 강력한 전략은 ‘기도’이며, 가장 뛰어난 기술은 ‘순종’입니다.
광야에서 샘물을 내시는 하나님: 때로는 모든 기술과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는 광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애써 만든 영상의 조회 수가 바닥을 치고,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게 됩니다. 그 실패의 순간은 기술이라는 우상이 깨어지는 은혜의 시간이며, 오직 성령의 생기만이 마른 뼈를 살릴 수 있음을 고백하는 거룩한 제단이 됩니다.
우리는 기술을 두려워하거나 배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 기술 위에 기도의 제단을 쌓고, 모든 과정 속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기술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가장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될 것입니다.

3. 작은 교회의 소외: 다윗의 물매돌은 작았다

고가의 방송 장비, 여러 명의 전문 인력으로 무장한 대형교회의 화려한 미디어 사역을 볼 때마다, 우리 교회는 감히 시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한정된 재정과 인력으로는 저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무력감, 결국 미디어 선교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작은 교회는 소외될 것이라는 패배감이 밀려옵니다.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과 무력감은 너무나 현실적인 감정입니다. 골리앗 앞에 선 이스라엘 군대처럼, 거대한 자본과 시스템 앞에 주눅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단 한 번도 크기와 숫자가 승리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언제나 작고 연약한 자들을 통해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작은 교회는 미디어 사역의 소외자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가장 적합한 ‘다윗’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성이 최고의 제작비: 2025년의 디지털 세상은 완벽하게 연출된 대작보다, 조금은 서툴러도 진심이 담긴 ‘날것’의 콘텐츠에 열광합니다. 특히 숏폼(Short-form) 콘텐츠가 지배하는 틱톡이나 릴스에서는 스마트폰으로 찍은 솔직한 영상이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규모와 상관없이 제작비와 무관하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은 꾸며내지 않은 진정성과 따뜻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장 강력한 경쟁력입니다.
전 세계가 아닌, 우리 동네를 위한 콘텐츠: 대형교회가 불특정 다수를 위한 보편적인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면, 작은 교회는 우리 교회가 속한 바로 그 ‘상황(Context)’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네 숨은 맛집 사장님의 신앙 이야기”, “우리 지역 청년들을 위한 주말 농구 교실”처럼, 지역사회와 깊이 연결된 콘텐츠는 대형교회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만의 무기입니다. 페이스북의 지역 타겟팅 광고를 활용하면, 단돈 몇만 원으로 우리 교회 반경 5km 안에 있는 이웃들에게 교회의 따뜻함을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습니다.
‘어벤저스’는 없다, 우리 안의 보석을 찾으라: 미디어 사역은 뛰어난 전문가 한두 명의 몫이 아닙니다. 작은 교회야말로 진정한 ‘공동체 사역’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스마트폰 영상 편집에 능숙한 청년, 사진 찍기가 취미인 집사님, 글솜씨가 좋은 권사님, 이야기보따리인 원로 장로님. 우리 안에 이미 보석 같은 재능들이 숨어있습니다. 이들을 발견하고 격려하여 함께 사역을 만들어갈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미디어팀을 꾸릴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묻고 계십니다. 그것이 비록 초라한 목자의 지팡이나 작은 물매돌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다면 우리의 작은것과 약한것이 강함으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4. 재정 낭비: 땅에 묻어둔 한 달란트가 아닌가?

큰맘 먹고 장비를 구입하고 광고비를 지출했는데, 기대했던 만큼의 반응도 없고 아무런 열매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 돈으로 차라리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선교사님을 후원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청지기의 삶이 아닐까요? 이 모든 시도가 결국 열매 없는 재정 낭비, 값비싼 자기만족으로 끝날 수 있다는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재정을 맡은 청지기로서 이는 너무나 중요한 질문입니다. 모든 헌신은 열매로 증명되어야 마땅합니다. 만약 미디어 사역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된다면, 당장 멈추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낭비’가 아닌, ‘전략적 선교’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새로운 길이 보입니다.
전도지가 수만장 인쇄되지만 많은 경우 전도지가 길거리에 버려지고 찢겨집니다. 하지만 전도지의 담긴 메시지와 그 전도지를 전하는 전도자의 복음전파의 열정을 더 귀하게 여기듯 디지털 미션에서도 포스팅 자체를 전도지로 생각하고 제작하고 전달하는 모든 과정이 전도와 선교로 사고를 전환할 수 있다면 완전히 새로운 사역의 지평이 열리게 될 겁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어리석은 종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다섯 달란트를 받아 다섯 달란트를 남긴 지혜로운 종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재정을 ‘영혼 구원’이라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만히 둘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신실하게 운용해야 할 것입니다.
낚시에서 농사로, 관점의 전환: 많은 경우 ‘낭비’라는 판단은 너무 성급하게 내려집니다. 미디어 선교는 한 번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 ‘낚시’가 아니라,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오랜 시간 기다리는 ‘농사’와 같습니다. 오늘 뿌린 콘텐츠의 씨앗이 당장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경작을 통해 신뢰가 쌓이면, 어느 순간 상상하지 못했던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일주일의 조회 수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실패는 학습: 설령 초기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더라도,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어떤 플랫폼이 우리 교회에 더 적합한지’에 대한 값진 데이터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 ‘학습 비용’은 미래의 더 효과적인 결과를 위한 가장 중요한 밑거름입니다. 첫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재정 낭비입니다.
최소 비용, 최대 효과의 퍼널 전략: 무작정 비싼 장비를 사거나 광고비를 태우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광고 퍼널(Funnel)’ 모델을 통해 매우 적은 비용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만 원의 소액 광고로 우리 지역에 사는 1,000명에게 교회의 존재를 알리고(인지), 그중 관심을 보인 100명에게만 다시 다음 단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고려), 최종적으로 10명과 깊은 관계를 맺는(전환) 방식입니다. 이는 재정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곳에 하나님의 재정을 집중하는 전략입니다.
미디어 사역에 드는 비용은 사라지는 ‘소비’가 아닌 지상명령에 대한 순종의 과정이며 영혼구원을 향한 사랑입니다. 전략을 가지고 지혜롭게 계획하고, 지속적으로 행동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열매를 기다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선한 청지기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5. 현장 예배 대체: 교회는 집, 온라인은 문 Open the door, and lead them home

편리하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되면, 성도들이 굳이 주일 아침 분주하게 준비해서 교회에 나오는 수고를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결국 실제 교회 공동체는 점점 텅 비게 되고, 성도 간의 깊은 교제는 사라진 채 각자 ‘소비’하는 신앙만 남게 되지 않을까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이 우려는 모든 목회자의 가장 큰 현실적 고민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온라인의 편리함에 안주하여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만약 온라인 사역의 목표가 오프라인 공동체를 대체하는 것이라면, 이 우려는 100%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고, 오히려 온라인을 오프라인 공동체의 역동성을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 이 위기는 놀라운 기회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온라인은 ‘문’, 오프라인은 ‘집’: 온라인 사역의 목표는 사람들을 온라인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오프라인 공동체라는 ‘’으로 들어오도록 활짝 열린 ‘’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문 앞에서 집 안의 따뜻한 온기와 맛있는 음식 냄새, 즐거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올 때, 사람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온라인 콘텐츠는 바로 그 집 안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초대장’이 되어야 합니다.
대체 불가능한 것을 더 강화하라: 온라인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오프라인 공동체만의 본질적 가치가 있습니다. 성찬과 세례라는 거룩한 예식,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는 중보의 뜨거움, 예배 후 식탁에 둘러앉아 삶을 나누는 교제, 함께 땀 흘리며 지역사회를 섬기는 봉사. 우리는 온라인 사역을 할수록, 이 대체 불가능한 공동체성(Irreplaceable Community : koinonia)의 가치를 더욱 강조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온라인은 만남의 시작점일 뿐, 신앙의 완성은 언제나 ‘함께 모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짐을 끊임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디지털 미션의 최종 목적지는 예배: 우리가 설계하는 모든 미디어 전략, 즉 ‘광고 퍼널’의 최종 목적지는 유튜브 채널이나 인스타그램 계정이 아닙니다. 그 종착지는 바로 우리 교회의 예배당 의자입니다. 틱톡에서 우리를 처음 알게 된 청년이, 유튜브의 설교를 통해 마음이 열리고, 마침내 교회 홈페이지에서 예배 시간을 확인한 후 이번 주일 당신의 옆자리에 앉아 함께 예배하게 되는것. 그리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공동체(가족)가 되는것입니다.
온라인은 교회의 경쟁자가 아니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온라인이라는 넓은 문을 통해 더 많은 잃어버린 영혼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감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6. 진정성 상실: 잘 편집된 거짓말을 넘어

카메라 앞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가장 경건한 표정을 짓고, 가장 은혜로운 말만 골라서 하게 됩니다. 교회 안의 갈등이나 개인의 연약한 모습은 감춘 채, 늘 화목하고 문제없는 천국 공동체인 것처럼 연출합니다. 이렇게 잘 기획되고 편집된 모습만 보여주다 보면, 교회의 솔직하고 진실한 모습은 사라지고 마는 것 아닐까요? 사람들은 완벽한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기댈 수 있는 진실한 교회를 찾고 있을 텐데요.
이 우려는 미디어 사역의 가장 깊은 영적 함정을 지적합니다. ‘보여주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속이는 ‘잘 편집된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실패를 감추는 데 급급한 교회는 결코 상처 입은 세상에 위로를 줄 수 없습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단 하나, 십자가의 복음이 가진 ‘역설의 능력’(The Power of the Paradox: The Cross)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닌,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납니다.
간증은 상처를 드러내는 용기: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콘텐츠는 성공 신화가 아니라 ‘간증’입니다. 간증의 핵심은 “나는 이렇게 잘났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깨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붙드셨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아픔과 성도들의 실패, 그리고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솔직하게 나눌 때, 세상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잃어버린 진정성(Authenticity)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교회는 성자들의 박물관이 아닌, 죄인들의 병원: 우리의 미디어 콘텐츠는 “우리처럼 되십시오”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도 당신과 똑같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위대한 의사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솔직한 고민, 성도들의 치열한 삶의 분투를 담아낼 때, 시청자들은 비로소 마음의 경계를 풀고 ‘나도 저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는 갈망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은 완벽한 교회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상처 입은 자들을 품어주는 진실한 교회, 실패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은혜의 공동체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디어가 그 진실한 모습을 세상에 비추는 ‘’이 될 때, 수많은 영혼이 그 빛을 보고 우리에게로 나아올 것입니다.